알프레드 <코메 프리마 : 예전처럼>, 2017, 미메시스
이탈리아인이지만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하는 만화가 알프레드(Alfred)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이탈리아에 3년 동안 머무르며 완성한 작품이다. 1920-50년대 이탈리아 빈티지 포스터의 색감처럼 명료하면서 강렬한 색이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진짜 재미는 서로 의절하고 살다 10년 만에 만나 여행을 떠난 두 형제의 이야기다. 1958년 여름, 동생 조반니는 아버지 유골함을 들고 연락을 끊고 살았던 형 파비오를 찾아 프랑스에 온다. 아마추어 권투 선수로 활동하는 파비오는 상금 5천 프랑이 걸린 아마추어 챔피언십 타이틀 매치 경기를 마쳤다. 권투 경기 장면과 파비오와 조반니의 만남 장면이 교차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격렬한 권투경기 장면 위로 감정이 상한 파비오의 말풍선이 올려진다. 의미심장한 오프닝의 연출 방식은 이후 파비오와 조반니가 낡은 친퀘첸토(피아트 500) 자동차를 몰고 이탈리아로 가는 여정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마치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영화처럼 좀 더 여유롭게 사실적인 장면과 움직임이 칸 안으로 들어온다. 타이트한 편집이라면 사라졌을 장면, 대사, 캐릭터들은 <코메 프리마(Come prima)>만의 색을 만든다.
권투경기 장면과 10년 만에 만나는 형제의 대면 장면이 교차 편집된 오프닝 시퀀스보다 앞서 3개의 색만 사용한 회상 장면이 나온다. 구체적인 정보를 드러내지 않은, 그래서 마치 누군가의 오래 묵은 기억처럼 막연하다. 과거의 어떤 강렬한 사건(아마 검은 셔츠단으로 상징되는 무솔리니 시대와 파시즘의 광풍, 노동계급에 대한 테러와 같은 역사적 사건들일 것이다)을 구체적으로 증언을 증언 하지 않고 기억의 파편으로 재현된다. 3개의 색만 사용한 작화 스타일이나 구체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칸, 상징적인 소품들은 마치 누군가의 꿈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효과를 낳는다.
조반니는 아버지를 모시고 이탈리아로 가는 여행에 동행해 달라고 부탁한다. 아버지의 유골함을 본 조반니는 마음이 흔들리지만(알프레드는 말과 다른 마음을 표정에 섬세하게 담아낸다), 단호하게 “이제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동생의 제안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조반니의 마음은 편치 못하다. 권투를 그만두고 정착하기를 원하는 애인과 말다툼을 한다. 그대로 방을 나간 애인이 조반니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한 오빠를 데려온다. 창문으로 그 모습을 본 조반니는 그 길로 동생을 찾아간다. 유산상속을 핑계로 동생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둘은 낡은 자동차를 끌고 프랑스에서 이탈리아까지 긴 여정에 나선다. 구조를 볼 때 고전적 로드무비처럼 보이지만,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떠나는 물리적 여정과 서로 인연을 끊게 된 과거를 되돌아 보는 심리적 여정이 겹쳐진다. 정교하게 계산된 여정을 따라 가다보면 마지막 페이지에 금방 도착한다. 네오리얼리즘 영화처럼 결말은 열려있고, 두 형제의 얽힌 과거에 대해 조금은 이해하게 된다.
작가가 참고한 네오리얼리즘 영화가 그렇듯 <코메 프리마>도 커다란 사회적 사건들이 한 개인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보여준다. 파시스트의 광기가 가득하던 이탈리아. 평범한 노동자이던 아버지와 달리 파비오는 작은 마을에서 탈출하고 싶던 열일곱 소년이었다. 때마침 무솔리니가 작은 마을을 방문했고, 파비오는 가족과 사랑하는 애인까지 모두를 버리고 아프리카 전선으로 떠나버렸다.
이제는 초라해 진 형의 “뭐, 모험이나 여행, 그런 것들! 그 우라지게 멋진 삶이 어땠는지 궁금하지 않아?”라는 비아냥 섞인 질문에 화가 간 조반니는 자동차에서 형에게 주먹을 날린다. 둘은 차에서 내려 뒤엉킨다. 으르렁거리듯 형에게 소리치는 조반니. “형이 떠난 이듬해부터 모든 게 나빠지기 시작했어. 형과 어울려 다니던 검은 셔츠단이 다시 거세게 몰아붙였으니까. 노조원과 당에 입당하지 않은 모은 사람을. / 아버지 같은 사람들을! / 아버지는 두 번이나 폭행을 당해 한쪽 무릎이 망가졌어. 칼로 삼촌은 결국 굴복하고 말았지. 입당하면 무사할 줄 알고 지원한 거야. 6개월 후 삼촌은 자기 머리에 권총을 대고 쐈어! / 마르코 소식도 알고 싶어? 외국으로 떠나 버려서 그 후로 어떻게 됐는지 결코 알 수 없었어. 리비오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알고 싶어? 파업에 반대하는 놈들 손에 맞아 죽었어. 몇 시간 동안 차디찬 길바닥에 방치된 시신을 아버지와 동료들이 야밤에 몰래 나가 겨우 수습했다고! / 계속할까? 우리에게 그 우라지게 멋진 삶이 어땠는지 아직도 알고 싶어?”(p73)
역사의 비극은 선명하게 가족에게 개입된다. 총통 만세를 외치는 광기의 틈바구니에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소년은 무엇에 홀리듯 고향을 떠났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파비오는 프랑스로 건너간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지만 파비오의 삶이 틀어졌고, 파비오로 인해 동생 조반니와 가족들의 삶도 틀어졌다. 물리적 여행과 심리적 여행이 교차하는 여정에 형제의 싸움과 회상이 섞인다. 대사는 주저 없이 필요한만큼 사용한다. 다행히 형제들의 말싸움과 독백과 회상 만으로 여행을 끌고 가지 않는다. 로드무비의 끌리세처럼 유기견이 합류하고, 형제들이 싸우다 차를 도둑 맞기도 한다.
“그 긴 세월이 지난 후에...난 이럴 거라고 상상하지 않았어.”
“형은 어떻게 상상했는데?”
“덜 고통스러울 거라고……”(p117)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여정에 형제는 오래 묵은 상처들을 서로에게 드러낸다. 형제는 마치 상처입은 들짐승처럼 이빨을 드러낸다. 그 와중에도 알프스 산맥으로 이어진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의 풍광은 아름답다. 작가는 힘을 뺀 자연스러운 드로잉으로 형제의 얼굴을 비추는 클로즈업 쇼트와 알프스의 풍광을 조망하는 익스트림 롱 쇼트를 번갈아가며 공간을 이어간다. 저녁, 아침, 점심 등 각 시간대에 맞게 변화하는 풍광의 중심에는 색이 있다. 알프레드의 색은 빈티지 포스터 색처럼 자제되어 사용해 분위기를 휘어잡는다. 어딘가를 지날 때 보았을 바로 그 저녁의 색이, 그 아침의 색이 칸 안에 자연스럽다. 무엇보다 디지털의 번쩍이는 빛이 없으니, 책으로 보는 만화의 힘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넘나드는 현대사의 한 자락과 그 안에서 형제, 가족, 공동체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관계가 엮여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매력적인 친퀘첸토를 타고 떠나는 여행의 여정에서 대화와 회상과 감정의 엇갈림으로 묘사된다. 국경에 가까운 작은 마을의 숙소에서 둘은 마주앉아 식사를 한다. 형인 파비오가 방에 먼저 올라간다. 아버지의 유골함을 보며 혼자 묻는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아버지는 돌아오면 죽이겠다고 날 위협했어요. / 기억나요? / 그런데 결국 아버지가 나를 찾아왔군요. / 뭘 보고 싶었어요? / 내가 어떻게 됐는지? / 그래서요? / 실망? 만족? / 상관 없어요? / 도대체 뭘 기대했던 거에요? / 빌어먹을,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던 건 나만은 아니었다고요, 제길! / 아버지도 그럴 수 있었어요. / 아버지는 왜 그러지 않았어요? / 거기서 내 꼴을 보며 킬킬대고 있겠죠, 안 그래요.”(p127-128)
길게 이어지는 칸은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다. 혼자 식당에 남아 밥을 먹던 조반니는 차를 몰고 가 형의 애인이었고, 이후에 조반니의 애인이었던 마리오를 만난다. 하얀 빨래를 줄에 널고 있는 마리아. 하얀 빨래를 사이에 두고 마리아는 “당신은 그때 이미 거짓말만 했어.”라고 싸늘하게 말한다. 조반니는 아무 대답 못하고 고개를 숙인다. 하얀 빨래 사이로 마리아와 조반니가 사라진다. 정지되어있는 그림이고, 심지어 아무런 효과선조차 없는 대도 불구하고 칸 안에서 빨래가 펄럭인다. 어디선가 본 듯한 흰 빨래들이 휘날리는 시퀀스지만, 한 번에 모든 걸 책임지려고 했던 조반니의 실패를 보여준다. 기억과 대화와 독백을 통해 과거의 이야기와 오늘의 감정이 조금씩 정리된다.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오며 눈에 띄게 색조가 환해 진다. 로드무비처럼 여정이 끝나는 지점에서 문제의 얽힌 고리가 풀릴 징조같다.
제목인 ‘코메 프리마’는 번역하면 ‘예전처럼’이다. 타국의 독자들에게는 좀 어색하지만, 자국 독자들에게 ‘코메 프리마’는 토니 달라라의 유명 칸초네 제목이다. 2013년 프랑스에서 최초로 출간되었고, 2014년 앙굴렘 국제만화 페스티벌에서 ‘취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우리나라에는 2017년에 번역되었다. (박인하)
comixpark
comics, graphic novel, manga, webtoon
0コメン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