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서재 #01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 기억 속에 집에는 늘 아버지의 책장이 있었다. 별도의 서재가 있었던 적은 없지만 거실이나 안방에 늘 커다란 책장이 있었다. 첫 기억부터 시작하는데 좋겠다.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잠시 살았던 시장 근방의 이층집에는 아마 크지 않은 거실에 책장이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병을 앓아 학교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갔다. 역시 집장사들이 빨리 지은 전형적인 70년대 도심주택이었다. 동일로 변 당시 86번 종점이 있던 사거리에 같은 모양의 집이 일곱채쯤 늘어서 있는 골목이었다. 골목 앞 빈터에는 고물상이 있었다. 우리 집은 가운데 쯤 있었다. 이층집이었는데, 일층에는 두집이 세를 들어 살았고, 이층에도 한 집이 세를 들었다. 우리 집은 주인집인 셈이었다. 이층에는 제일 큰 안 방과 작은 방 두 대, 별도로 출입문이 있던 독립된 방 하나(이 방을 따로 세 내주었다), 그리고 부엌 옆에 작은 방이 있었다. 이 지점에서 기억이 헛갈리는데 방 하나를 내가 썼던 것 같고, 다른 방 하나에는 삼촌이 살았던 것 같다. 제일 큰 안방에는 가로로 긴 책장이 있었는데, 일단은 여닫이 문이 있었고 이단부터 책을 꽂을 수 있게 구성된 튼튼한 책장이었다. 

안방 정면에 창문이 있었고, 그 옆으로 길게 책장이 자리를 차지했다. 책장의 맨 왼쪽에는 LP를 재생하는 턴테이블과 앰프가 있었고, 그 위로는 릴 테이프 녹음기가 있었다. 아버지는 이 LP로 주로 클래식을 들었고, 나는 집에서 앰프와 릴 테이프 녹음기를 우주선으로 사용했다. 일단 위 발을 딛고 설 정도 공간이 있었다. 나는 그 공간을 거슬러 올라 앰프 앞 자리에 착석했다. 위, 아래로 올리는 클래식한 버튼 몇 개를 위로 올리고 "출격"을 외쳤고, 적 우주선과 마주하면 볼륨 버튼을 돌려 레이저를 쏘았다. 몇 개의 릴 테이프가 있었지만, 특별히 들어본 적은 없다. 1984년 중학교 3학년 때 갑자기 서울에서 무려 서해안 끝 무안군 망운면 피서리 속칭 톱머리 앞 바다로 이사를 갈 때까지만 해도 이 거대한 책장과 턴테이블과 앰프와 릴 테이프 녹음기는 살아있었지만, 1989년 다시 서울로 이사올 때는 커다란 책장도 턴테이블도, 앰프도, 릴 테이프도 다시 시골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천천히 이야기하겠지만, 책장에는 세계문학전집 100권짜리와 동아원색대백과사전 30권짜리가 제일 눈에 띄였다. 세계문학전집은 10권 단위로 띄지의 색이 달랐다. 선명한 원색 띄지와 함께 언젠가 꼭 읽어볼거야, 라는 느낌을 주는 그런 책이었다. 동아원색대백과사전은 초등학생 시절 보았던 계몽사백과사전을 대치하는 심심풀이 책이었는데, 한 권의 무게가 대단했다. 심심할 때면 빼서 보곤 했다. 그 옆 어딘가에 수예편물 전집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4학년 때인가 학교에서 바느질을 하는 숙제가 있었다. 그 때 이 책에 나온 필통만들기를 그대로 따라해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책장 어딘가에 70년대 말 극장가를 뜨겁게 달궜던 <스타워즈>, <오멘(징조)>의 소설버전이 있었다. <스타워즈>는 특히 좋아하는 책이어서 몇 번은 읽었지만, <오멘>은 무서워서 책만 몇 번 꺼냈다 보기하고 말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시골로 이사를 간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안방은 곧 아버지의 서재였다. 무언지 모르지만 바깥 일을 좋아했던 어머니를 둔 덕에 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아버지의 서재는 내 놀이방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우주선에 탑승해 우주를 누비기도 했고, 침대 위에서 프로 레슬러가 되기도 했다. 순전히 제목이 멋있어서 읽어보려 노력했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대한 골치아픈 기억이 있었고, 세계여행책을 뒤지며 이국을 꿈꾸기도 했다. 그 서재는 1984년에 수백킬로미터를 달려 시골로 내려갔다가, 다시 몇 년 뒤에 서울로 올라와 상계동 아파트 단지에 정착했다. 몇 년 간 서해안 바닷가에서 그동안 하던 일과 완전히 다른 일을 하시던 아버지는 1989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일을 시작했다. 주로 잡지사에 편집국장이나 주간을 했다. 아주 작은 잡지사도 있었고, 제법 규모가 있는 잡지사도 있었으며, 새로 창간하는 잡지도 있었다. 몇 년을 일하며 새로운 책이 들어오기도 했다. 1996년 결혼 날짜를 잡고, 신혼집으로 쌍문동 반지하집을 얻고 나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상계동 아파트에서 안성으로 이사를 했다. 1995년 4살 차이 여동생이 먼저 결혼해 분가를 했고, 나도 독립을 했지만 난데 없이 안성이라니. 싼 가격에 넓은 땅을 샀고, 넓은 터에 있던 샌드위치 패널로 지은 집이었다. 도대체 이해가 안갔지만, 이 집으로 이사를 와 아버지는 드디어 독립된 서재를 얻었다. 그래봐야 크지 않은 방이었고 그 방에 우겨넣듯 책장과 책, 그리고 내가 쓰던 낡은 책상이 자리잡았다.  

어머니는 예전처럼 바빴고, 아버지는 이곳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쓰다 치워놓은 대우 르모 3 워드프로세서로 초고를 쓴 소설 <소현세자>는 1996년 창작과 비평에서 두 권짜리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대학 재학시절 꾸었던 문학청년의 꿈을 수십년 만에 이룬 것이다. 아버지는 안성에서 신작 <니고데모>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1999년 2월 22일 외할머니댁에 어머니와 가던 중 가벼운 접촉 사고 후 방에서 주무시다 세상을 떠났다. 황망하게도. 그날 이후 아버지의 서재는 굳게 닫혀있었다. 누구도 오래 묵은 책들을 정리하지 못했다. 가끔 방을 열어 보기도 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두겹씩 쌓인 책들에는 먼지만 내려 앉았다. 

1999년 2월 22일 이후 주인을 잃은 아버지의 서재를 2017년 여름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시세보다 싸게 사 몇 배의 차익을 올릴 것 같았던 안성 땅은 애를 먹인 끝에 무려 21년이 지난 2017년에 겨우 계약이 이루어졌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서재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버릴 책을 고르고, 헌책방으로 보낼 책들을 팔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7년 8월 5일 아버지의 서재에 다시 들어갔다. 책 한 권 한 권이 낯익었다. 제목에 불과해도 초등학교 때 보던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책을 정리하다 먼지를 털고 책을 읽기도 했다. 어떤 책에서는 저자가 쓴 "박형, 기사 잘 부탁드립니다"는 글이 써있기도 했다. 기증받은 책도 있었지만, 월급에서 매월 할부를 넣은 전집들도 꽤 많았다. 심지어 아버지가 대학에 다닐 때 보던 책도 있었다. '박안식 장서'라는 글도 보였다. 몇 권에서는 할아버지의 사인을 찾을 수도 있었다. 목사님이었던 할아버지의 성함은 박요한. 할아버지는 영문으로 이름을 쓸 때는 꼭 Johan Park이라고 했고, 사인도 멋진 영어 필기체로 Johan Park이라 썼다. 몇 권은 내가 산 책도 있었다. 책들을 골라 내 묶을 뿐이었는데 면목동 집장수 이층집의 서가에서부터 시작해 톱머리 바닷가의 서가와 상계동 아파트의 서가와 안성 샌드위치 패널로 지은 집의 서가까지 시간을 거슬러 다녔다. 

책을 묶어 헌책방으로 가지 못하고 연구실로 돌아왔다. 11년을 탄 낡은 웨곤에 꽉 채워 연구실에 옮기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정리되었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 그리고 나에게 이르는 책으로 이어지는 질긴 무언가를 한번 생각해 볼 생각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책의 가치가 아니라 아버지의 서재에서 보던 책, 아버지의 서재에서 찾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해 보려고 한다. (박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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