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서재 #02

한 두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책 정리는 세 번을 넘어 네 번까지 갔다. 주말을 온전히 반납하고 책 정리에 매달렸다. 책 정리에 속도가 붙지 않은 까닭은 작은 서재에 책이 가득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책장마다 두 줄씩 책이 있었고, 책상 아래나 옆 빈 자리에도 책이 가득했다. 많은 책을 줄로 묶어 가져왔다면 좀 더 속도가 났을 터이지만, 가져올 책과 버릴 책을 구분해야 했다. 구분을 하다 보면 몇 장씩 책이나 잡지를 넘기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책을 읽고 있었다. 

시간이 봉인된 옛날 책들은 나를 과거로 불렀다. 하지만 과거에 그 책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보다는 오늘 이 책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가 중요했다. 적어도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남겨두고 고물상으로 옮겨간 책의 운명을 가른 건 과거가 아니라 현재였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다 가져온 잡지와 버린 잡지들의 운명은 오늘이 갈랐다. 대학시절 즐겨 보던 <말> 잡지가 빈 공간에 가득 쌓여있었다. 책장 한쪽에는 1983년, 1984년판 <리더스다이제스트>가 있었다. <직장인>도 한묶음이 있었고, <마당>이라는 잡지도 한묶음이었다. <말>과 <마당>은 내가 산 잡지다. <말>은 대학에 다닐 때,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몇 번 사서 보던 잡지였다. 1980년대의 진실을 담은 잡지라 생각했고, 챙겨 읽었다. <마당>은 1980년대 해직기자들이 전집편집의 귀재라 평가받은 계몽사 만든 잡지이면서, 안상수 선생이 아트디렉터로 참여한 최초로 아트디렉션이 도입된 잡지였다. <마당>은 헌책방에서 부지런히 사 모았던 잡지다. 역시 버리지 못하고 들고 왔다. <리더스다이제스트>는 아버지가 열혈 독자였다. <직장인>은 도대체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창 활동할 40대에 신문사라는 좋은 직장을 그만 두고 전남 무안으로 낙향한 아버지가 몇년 만에 복귀해 편집부장으로 만들던 잡지였다. <리더스다이제스트>와 <직장인>을 묶어 집 창고로 가져왔다. 

<말>은 80년대말과 90년대 초 뜨거웠던 시대에 서점에서 열심히 사 보던 잡지였다. 그 시대는 잡지가 아니라 정리된 책으로 보는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은 고물상으로 보냈다. 

가장 무거운 책이 동아출판사의 원색대백과였다. 야심차게 만든 백과사전. 심심하면 책장에서 뽑아 넘겨 보던 책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계몽사의 원색대백과사전을 봤다면, 중학교 때는 이 책을 심심찮게 넘겨봤다. 78년 시작해 84년에 완성된 32권짜리 백과사전은 아무 권이나 찾아 읽어도 흥미로운 지식이 가득한 책이었다. 그런데 책이 너무 무겁고, 컸다. 

"동아원색대백과사전 30권 풀 셋. 들어보니 아트지로 만들어서 그런지 엄청 무겁다. 심심하면 꺼내보던 책이었는데, 다시 들고 왔다. 필요하신 분이 계시면 보내드립니다."라고 페이스북에 올렸다. (2017년 9월 4일) 신촌에서 만화Bar를 하는 페이스북 친구인 황순욱 씨가 기증해 달라는 글을 남겼다. 책을 들고 우체국에 갔다. 제일 큰 택배박스 3개로 나눠 포장을 해서 책을 보냈다. 아래 사진은 '신촌 피망과토마토 망가BAR'에 도착한 '동아원색대백과사전'이다. 언제 한 번 들러보겠다는 약속만 남기고 아직 가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사전을 좋아하셨다. 새책을 사기도 하고, 헌책방에서 오래 된 사전을 사 오시기도 했다. 기사를 쓸 때면 꼭 사전을 활용하셨다. 아마 지금 뭔가 필요하면 구글을 검색하는 것처럼 사전을 활용하셨다. 나에게는 낮에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심심할 때 뒤적이던 백과사전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기사나 글을 쓸 때 요긴하게 활용하던 사전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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