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지 100주년이 되던 해였다. 많은 유럽인들이 100주년을 기념했다. 기념품이 나오고, 행사가 개최되었으며, 책이 출간되고, 타큐멘터리가 방영되었다. 프랑스의 만화가 자크 타르디(Jacques Tardi)의 <그것은 참호전이었다(C'était la guerre des tranchées)>도 2014년 책 출간 20주년과 제1차 세계대전 100주년을 기념해 새롭게 42쪽에 이르는 스케치, 삽화, 포스터 등을 부록으로 첨부한 기념판이 새롭게 출간되었다. 그리고 2017년 1994년 출간된 이후 개인이 경험하는 전쟁을 가장 처절하게 그린 <그것은 참호전이었다>가 한국에도 출간되었다.
<그것은 참호전이었다>는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의 이야기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울린 단 한 발의 총성은 유럽을 전쟁의 참화에 밀어넣었다. 세르비아 자객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를 암살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러시아, 프랑스, 영국의 3국 협상국(연합국)이 세르비아를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전쟁에 참전하며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 중동, 아프리카, 동아시아, 대서양, 인도양, 태평양 등 세계 여러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뤘다. 협상국은 일본과 미국이 참여한 연합국으로 확대되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맹국에는 투르크와 불가리아가 동맹국에 참여했다. 1914년에서 1918년까지 제1차 세계대전이 지속되는 동안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났고, 남자들이 전장에 나간 사이 여성의 사회참여가 확대되었고, 전쟁에 이기기 위한 다양한 기술이 개발되고 실용화되었으며, 전쟁의 참사를 막기 위해 국제연맹이 창설되었다. 이 전쟁은 세계가 경험은 이전의 전쟁과 전혀 다른 양상이었으며, 로버트 오닐(전 옥스퍼드 대학 전쟁사 교수)의 말대로 "서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그 어떤 분쟁과도 전혀 다른 도전"이었다.('모든 것을 끝내기 위한 전쟁', 2008, 플래닛미디어, p12)
만화에서 전쟁을 그리는 방향은 (1)스펙터클이거나 아니면 (2)가족이나 동료를 위해 목숨을 거는 열혈에 있다. 스펙터클이나 열혈은 단독으로 존재하기 보다는 대개 상호작용하며 독자에게 호소한다. 스펙터클과 열혈이 전면에 나서면 전쟁은 만화 안에서 독자들에게 낭만적으로 대상화되기도 한다. 전쟁의 참사, 전쟁의 비극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참사와 비극보다 앞에 전쟁의 스펙터클이 있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열혈이 있다.
하지만 자크 타르디의 <그것은 참호전이었다>는 다르다. 전쟁에 나서야된다는 격문도, 국악대의 연주에 맞춘 행진도, 열차에 탄 군인들을 향한 환호도, 전선의 이동도, 심지어 다른 전선의 상황도 나오지 않는다. 포탄이 터지고, 총알을 날리며, 적을 무찌르는 스펙터클도 없고, 재단에 바치는 죽음으로 형상화되는 열혈도 없다. 만화에는 철조망이 뒤엉킨 무인지대가 있고,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파놓은 쏟아지는 포탄과 시체가 뒤엉키고 쥐가 다니며, 어디에선가 총알이 날아올지도 모르고, 황당한 명령만 존재하는 참호가 있다. 무엇보다 참호 안에는 사람들이 있다.
따르디는 참호 안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참호전이었다>의 첫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비네다. 무인지대로 정찰을 떠났다 사라진 포쉬를 한참 바라보던 비네는 "어떤 나라라 해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이유는 없다"(15)고 생각하던 사내였지만, 죽은 게 틀림없는 포쉬를 찾아 한밤 중에 무인지대로 달려간다. 비네는 "포쉬가 어딘가 숨어 있을 것"(22)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게 비정상인 참호 안에서 그는 이 비정상적인 생활이 독일과 프랑스군이 서로 짜고 벌이는 일이라 생각했다. 누군가는 미쳤다고 했겠지만, 비네가 보기에 모든게 비정상적이었다. 비네는 포쉬의 시체를 발견하자마자 독일군 기관총이 쏟아졌고, 복부에 다섯발을 맞았다.
자크 타르디는 유장한 내레이션으로 이 부조리한 상황을 설명한다. 한 칸 한 칸이 독립된 패널 안의 그림처럼 독립적이고, 여러 칸이 모인 페이지는 또 한 장의 그림이 된다. 칸과 칸이 프레임처럼 묶이는 영화적 연속성은 없지만, 한 칸은 긴 호흡으로 독자들에게 참호와 그 안에 사로잡힌 인간의 비극을 보여준다. 전쟁사를 이야기하지 않고, 전쟁에 나선 영웅들을 그리지도 않는다. 참호 안에서 보초를 서는 위에 일병은 2년 전 벨기에 진영에서 독일군이 마을의 아낙네들과 아이들을 앞세우며 진군할 때 도랑에 포복한 프랑스 군의 무차별 사격을 잊지 못한다.
"위에는 그 여름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그날 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살육이 일어났는지 말이다."
위에는 양손으로 두 아이를 잡고 있던 젊은 여자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고, 참호나 대피소에 들어가면 항상 두 아이와 여자의 모습을 보았다. 비가 내리는 10월 밤에도 위에는 두 아이와 여자의 모습을 보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참오를 넘어 독일군 진지를 향해 걸었고, 배 한가운데 총을 맞고 죽었다. 전쟁은 비이성적이다. 감성적이지도 않다. 한 개인이 참호 안과 밖에서, 후방의 마을에서 겪은 경험은 언어로 설명하기 어렵다. 자크 타르디는 회색조로 전쟁에 나선 인간 문명의 암울함을 칸 안에 담아낸다.
르비요 장군은 1914년 12월 13일자 신문에서 “프랑스에서 이상과 신성의 의미를 부활시키는 전쟁이 일어날 때가 왔던 것이다”(31쪽)고 말했다. 포탄이 배를 갈라놓고, 수많은 군인들이 땅 속에 숨어 목숨을 유지하려 하고, 본보기로 즉결처형이 벌어지던 바로 그 참호전에 대해 장군들은 이상과 신성의 의미를 부활시키는 전쟁에라 선동한다. 게다가 슬프게도 그 선동은 대중들의 마음에 전쟁의 스펙터클과 열혈로 호소한다. 1914년 8월 2일 일요일 파리 거리에 붙은 총동원령 포스터를 보고 시민들은 선명하게 증오를 내뱉었다. 까페의 악대가 ‘라 마르셰에즈’를 연주하고, 모든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국가를 따라부른다.
“Qu'un sang impur, Abreuve nos sillons!(저 더러운 피, 밭고랑을 적시게)” 모두가 광기에 사로잡힌 까페에서 한 노인만 제 자리에 앉아있었다. “노인은 독일에 팔린 첩자, 배신자, 독일 놈 취급을 받았다.”(37쪽)
여러 경험담들이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배치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스케치와 카툰, 삽화, 포스터 등이 첨부된 새로운 판본의 말미에 타르디는 새로운 작가의 글을 남겼다. 전쟁의 기념품으로 소비되는 2014년 그는 “나의 가여운 할아버지, 솜 지역에 있던 한 제당공장의 폐허속에서 며칠 동안 죽음과 사투를 벌였던 당신.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이 누구를 위하여 총알받이가 되었는지 알았다면 좋았을 것을….”이라 남겼다.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박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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