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보낸 10년, Adrian Tomine <New York Drawings>

이건 만화인가? 만화가 아닌가? 에이드리언 토미네(Adrian Tomine)의 <뉴욕드로잉 : 뉴욕에서 보낸 10년의 기억과 기록(New York Drawings)>(Drawn and Quarterly, October 2, 2012)은 캐캐묵은 만화인가, 아닌가의 논쟁을 끌어내기 좋은 책이다. <뉴욕드로잉> 본문 170쪽에서 고전적인 방식 만화의 형식에 부합된다고 생각되는 만화는 다섯편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대개 잡지 «뉴요커(The New Yorker)»의 표지나 기사에 사용된 삽화들이다.(한국판은 2017년 6월 15일 (주)아트북스에서 출간되었다.) 

저자인 에이드리언 토미네1974년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이다. 열여섯 살이던 1991년 <옵틱 너브(Optic Nerve)> 시리즈를 자비로 출간하며 만화를 시작했다. 4년 뒤인 1995년 캐나다 몬트리올의 만화전문출판사인 드론앤쿼털리(Drawn and Quarterly)는 <옵틱 너브>를 정식으로 정식 출간했고, 만화 단행본도 출간했다. «뉴욕타임즈»에서 주목할 만한 책으로 선정한 <완벽하지 않아(Shortcomings)>가 한국에 번역되었다.

<완벽하지 않아>는 제목처럼 완벽하지 않고 단점만 많은 평범한 이들의 구차한 일상을 가까이에서 보여준다. 주인공은 일본계 미국인 커플이다. 하야시 미코는 영화제 사무국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다나카 벤은 극장 매니저이자 대학교 강사다. 인종차별이나 입양 같은 무거운 주제가 선명하게 제시되지는 않지만, 만화에 등장하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내면에는 인종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 평범한 커플이 싸우고, 헤어진다는 줄거리지만, 인종문제와 성정체성에 대해 여러 질문을 던진다. 에이드리언 토미네의 만화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별 시답지 않은 일들을 칸 안으로 끌어들인다. 픽션이 지녀여할 덕목, ‘연출’이라는 이름으로 독자들에게 작가의 의도를 따라오도록 하는 정교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모눈종이처럼 똑같이 나뉜 칸은 모양이나 크기로 독자에게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지 않는다. 기계적 중립처럼 보여 따분할 때도 있지만, 책을 열 때 온전히 칸 안에 집중하도록 하는 장점도 분명하다. 물론 이건 토미네만의 새로운 형식은 아니다. 

에이드리언 토미네는 한국이나 일본의 만화가나 디씨나 마블의 작가들처럼 작업량이 많지 않다. 만화가이지만, 만화만을 그리지는 않는다. 주요 신문에 연재하는 삽화도 많이 그린다. <뉴욕드로잉>은 에이드리언 토미네가 미국의 주간잡지 «뉴요커»에 기고한 삽화를 모은 책이다. «뉴요커»는 1935년 2월 17일 창간호가 나온 후 매주 뉴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과 평범한 일상의 모습을 소설, 에세이, 시, 르뽀, 만화, 비평 등을 통해 담아낸 잡지다.

만화는 칸으로 나뉜 연속된 그림이다. 한 페이지에 한 장 혹은 두 장 정도 그림이 들어간 <뉴욕드로잉>은 형식적으로 볼 때 만화책이 아니라 아트북에 가깝다. 한국 출판사도 아트북의 하나로 출간했다. 에이드리언 토미네의 만화를 읽지 않은 독자라면, 구태여 칸으로 나뉜 그림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 터이고, 그렇다면 <뉴욕드로잉>은 책 제목처럼 뉴욕을 그린 그림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이드리언 토미네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뉴요커들의 일상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한 장의 그림이 잡아낸 공간과 인물의 디테일은 간략하지만 진실하다. <뉴욕드로잉>의 표지(원 출처는 «뉴요커» 2004년 11월 8일자 표지)로 사용된 ‘놓친기회’를 통해 <뉴욕드로잉>의 특징을 살펴보자.

첫 번째, 작가는 삽화 하나하나에 제목을 붙였다. 소설이나 영화 평론 등에 들어가는 삽화도 별도의 제목을 붙여 글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도록 했다. ‘놓친기회’도 제목을 갖고 있는 독립된 존재로 표지나 글과 병립된다. 두 번째, 그림 안에 이야기가 담겨있다. 표지삽화를 10여가지 시안을 만든 끝에 완성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작가를 도와준 프랑수아즈 몰리가 “이미지가 이야기의 씨앗을 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밝혔다.(173쪽) ‘놓친기회’의 주제는 ‘책’이다. ‘놓친기회’는 스쳐가는 지하철에서 창문을 통해 책을 읽은 상대방을 발견하는 그림이다. 아주 우연히 창문과 창문 너머로 책을 읽는 상대방을 발견한 두 남녀의 ‘순간’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다. 뭔가가 통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지하철에서 내릴까? 제목을 미루어 보면 ‘놓친기회’니까 이걸로 끝나는 걸까? 보통 로맨스 장르라면, 두 사람은 분명 어디에선가 다시 마주하게 되겠지? 이야기의 씨앗을 담은 그림은 독자들의 정서를 움직인다.

<뉴욕드로잉> 안에 소개된 «뉴요커»의 표지 삽화는 한 장 한 장이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기사에 삽입된 삽화는 어떨까? 아주 자연스럽게 글이 다루고 있는 그 작품을 불러낸다. <화양연화>에 대한 비평에 들어간 삽화는 <화양연화>를 불러내고, <8마일>에 대한 비평에 들어간 삽화는 <8마일>을 불러낸다. 여기에 «뉴요커» 에세이에 들어간 삽화는 독립되어있지만, 뉴욕이라는 도시, 그리고 그 도시에 사는 사람을 통해 그림과 그림이 분리되지 않고 연결된다. 그리고 그 연결은 뉴요커를 비롯해 대도시에 사는 평범한 누군가의 일상과 다시 연결된다. 이건 단순히 사실적인 공간의 묘사가 만들어낸 효과가 아니다. 스스로 뉴욕에서 살며, 생활의 조각들을 모아 그걸 한 장의 그림에 담아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이건 한 장의 그림에 이야기를 담은 만화다. 아니, 만화다, 아니다의 논쟁은 의미 없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만화일수도, 아닐수도 있다.

미국의 소설가 조나단 렛햄(Jonathan Lethem)은 에이드리언 토미네의 작품을 2013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단편소설의 대가 엘리스 먼로(Alice Munro)의 소설에 비유한다. 엘리스 먼로의 단편소설이나 예술영화처럼 격정적인 플롯보다는 사람의 일상을 담아낸다. 만화도 그렇지만, <뉴욕드로잉>에서 만나는 삽화나 거리에서 그린 드로잉도 마찬가지다. 뉴욕을 관찰하고, 그 안에 사는 사람을 그린다. 한 장의 그림은 다음 장과 다음 장으로 느슨하게 연결된다.

<뉴욕드로잉>이 만화인가, 아닌가는 의미 없다. 드로잉북이나 아트북으로 읽어도 정확하고 간결한 스타일은 읽는 재미를 준다. 거기에 더해 연결과 연결의 재미까지 찾아낸다면 아마 에이드리언 토미네를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하나 더. 신문과 만화가 결합하는 방식이나 뉴욕이라는 도시를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에서 읽어보는 것도 흥미롭다. (박인하)



“<뉴요커>는 1925년 2월17일 해럴드 로스와 그의 아내이자 <뉴욕 타임스> 기자였던 제인 그랜트가 창간한 미국 잡지다. 기본적으로 주간지지만 2주 동안의 기사를 모두 모은 합본호를 1년에 다섯 차례 발간한다. ‘뉴욕에 사는 이들’(The New Yorker)이라는 잡지명처럼 뉴욕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과 생활상을 주로 다룬다. 단편소설, 문학·미술 비평, 수필, 시, 르포르타주, 만화 등을 싣는데 특히 대중문화에 대한 심도있는 논평,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한 각종 기사와 인기있는 연재만화로 정평이 나 있다.” (장미, ‘<뉴요커>는 어떤 잡지인가?’, 『씨네21』, 2006년 11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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